덕암 칼럼 사라진 배려, 다시 회복해야
2025.11.27 04:30:08
언제부턴가 대한민국 사회가 각박하고 인심이 메마른 인성가뭄이 저변에 자리 잡았다. 배려는 권리가 되었고 양보는 미덕이 아니라 호구로 보이는 현상이 이제는 당연시 되어버렸다.
물론 아직도 봉사, 친절, 질서, 등 기본을 지키는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있기에 그나마 살만하지만 지금처럼 이해타산적인 분위기로 변해 간다면 머지않아 돈이나 권력만이 살아남고 약자나 가난한 자는 점점 살기 힘들어 질 수 밖에 없는 미래에 봉착하게 될 공산이 크다.
1970년대 그 가난하던 시절에도 이웃 간의 정이나 화목한 가정, 인간적인 상호 존중의 인심은 훈훈했었다. 하지만 약 50년이 지나면서 시대 변할수록 과학과 문명, 그리고 문화예술, 스포츠 등 모든 분야가 발전했으나 정치는 제자리가 아니라 후진성을 면치 못했고 국민들의 이기적인 사고는 극명하게 분리됐다.
가진 자의 욕심과 가난한 자의 빈곤은 악순환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자본주의 단점이기도 하지만 돈이 돈을 버는 구조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질문명이 가져오는 폐단이 비단 대한민국의 일만은 아니었다.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물 건너온 온갖 제도, 문화, 문명들이 아시아에 정착하면서 발생되는 부작용은 이미 손쓰기 어려울 만큼 사회전반에 자리 잡았다.
그중 가장 큰 것이 심성, 혼, 정신인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으므로 수정이나 대안마련을 세울 수 있겠지만 무형의 변질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물론 이러한 변질에는 첫째 주거문화의 변화였다.
마당이 있고 불을 때면 굴뚝이, 우물이나 수동펌프로 생활용수를 해결하던 시대에는 부뚜막 이라는 게 있었다. 열악한 취사환경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여인들은 모든 가사노동을 거뜬히 해결하는 인내와 노력과 정성이 있었다.
한 번 결혼하면 죽어도 시집 귀신이 된다는 말을 당연시 받아들였으며 때로 험난한 시집생활을 견뎌내는 삶의 원칙이 있었다.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어떡하든 견뎌냈으며 그런 와중에도 다산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잘 키워내는 위대한 어머니들이었다.
노동자들도 야근에 철야는 기본이었고 노조가 생겨도 사측과 누가 죽나 해보자는 아니었다. 간혹 어용노조가 있기도 했지만 구사대의 폭력 앞에 속절없이 견뎌내야 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의 귀족노조가 생겨났던 것이다.
학생들도 서로 맞짱 뜨고 싸웠어도 운동장 한 켠에 수돗가에서 코피를 씻고 나면 다시 화해의 악수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이웃 간에 싸웠어도 떡이나 과일을 나누며 서로 돈독한 관계로 회복되던 날들이 참 많았다.
부모죽인 원수가 아닌 다음에야 어떤 식이든 대립은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다시 친해지고 자라는 아이들까지 이웃은 희비애락을 나누는 그런 사이로 금 새 회복됐다. 누가 죽나 소송까지 벌여가며 교도소를 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원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던 날들이 이제는 달라졌다. 앞서 거론한 것처럼 주거문화가 아파트로 발전하면서 편리하고 아늑한 첨단 건축과학의 모든 시스템이 삶의 질적 향상을 가져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편리함과 함께 신체적 반응의 무능, 면역력 퇴화, 물질에 기대는 비중들이 늘어갔다.
이제 휴대폰이 없으면 아무런 의사표시를 할 수 없고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5층 이상은 걸을 엄두도 못 내며 배달의 민족이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지 않으면 음식조리는 기본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대에 도래했다. 골목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함께 쓸며 눈인사를 당연하게 건네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마당과 골목길이 없어지면서 왁자지껄 요란하던 아이들의 놀이문화도 사라졌고 대신 서로 경쟁해야 하는 공교육 시스템 속에 학원이나 과외 하러 다니느라 입시지옥에 메마른 정서는 당연한 것이 됐다.
이웃집과 떡이라도 나눠먹던 미풍양속은 진작 실종되었으며 울타리 도 없어지고 옆집에 누가 죽었는지도 몇 주, 몇 달이나 지나서야 알 수 있는 현실에 봉착했다.
이렇듯 사설이 긴 것은 OECD 국가 중 행복지수도 최악이고 한해 1,8 만 명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성공(?)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대안제시가 시급하기 때문이다. 발전한 현대 문명을 지금 와서 되돌아가면 아무도 견디지 못한다.
이제 와서 울타리 치고 마당과 부뚜막을 만들어 살라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할 수 없는 게 있듯이 할 수 있는 것도 있으니 그 대안을 함께 공감해 보자. 먼저 지난 16일은 관용의 날이다.
유엔에서 정한 국제적인 기념일인데 1993년 총회에서 결의되어 1995년부터 시행되었으니 년도수로 보자면 29년 째인 셈이다. 여기서 관용이란 지금의 시대에 걸 맞는 배려를 뜻하는 것이며 너그럽게 이해하고 서로 다르다고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즉,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 의견을 주장할 권리를 박해받는 다면 함께 싸울 것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동양의 견해에서 보자면 어질다는 의미의 한자 인은 맹자가 인간의 기본윤리로 제시한 오상, 즉 인, 의, 예, 지, 신,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이 인이다.
작금의 현대사회에서는 어질어 봐야 돌아올 건 손해라는 공식이 상식이 됐다. 양보는커녕 여차하면 입에 들은 것도 빼먹는 이른바 아귀다툼을 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화사기, 다단계로 남의 주머니를 털어 내 욕심을 채우는 시스템, 충분히 말로 해도 될 일을 고소부터 하고 보는 법의 잣대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현대 대한민국 범죄자를 수용하고 있는 교도소는 약 5만 명 기준이며 8만 명에 이르는 교정시설은 턱 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관용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수감되기까지 최소한의 경로가 있는데 싸워서 승소하면 상대는 그만큼 벌을 받게 되며 죄를 인정하기보다 두고 보자는 앙심만 품게 된다.
해결방안이 있다면 관대함이 무엇보다 큰 덕임을 공감하는 문화가 저변에 확대되는 사회적 분위기다. 호구가 호걸임을 알아주는 문화, 지금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는 공교육이 절실하다.

hyunsur song
